의술
9523.030817 의사
우리조상들이 ‘ 신체발모수지부모 ’ 라며 머리카락하나라도 소중히 여겼던 시대사조는 망각의 뒤 안에 묻히고 , 장기를 절제 ( 切除 ) 하며 교체하여 사람을 한낱 부품의 조합구조물쯤으로 여기는 세상에 살고 있어서 이런저런 생각을 하게 한다 . 나와는 무관하게 그저 그러려니 하고 지냈었는데 , 장모님의 식도암 진단에 뒤따른 수술여부에 대해서 생각해야 하는 이즈음에는 더욱 골똘한 생각에 잠긴다 . 진실한 믿음이 있는 사람 말고는 자기를 존중하여 - 조상들의 사상을 숭배하지는 않아도 - 자기 몸을 의미 있게 소중히 하려는 사람을 찾기란 어려운 이즈음이다 . 그것은 상당한 부분을 의술에 의존하는 현대 생활방식에도 연유하겠지만 본연의 인간생명을 도외시하고 치달아 가는 상업성 때문이기도 하다 . 하물며 의술에다가 자기의 삶을 의지해 사는 사람들에 있어서야 말 할 나위 있을까 ! 자기 몸을 자기가 사는 것이 아니라 의사가 살게 하는 것으로 오해하리만치 의술에 의존하는 생활양식을 두고 하는 말이다 . 여기에 빗대어 나를 생각해본다 . 나 홀로 원시적 생활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만 내 몸을 받은 그대로 , 사는 날까지 가지고 가보고 싶은 절실한 마음에서 , 그대로 미적거리면서 의사와 담쌓고 지내는 것이 어쩌면 고집스런 내 성정 탓일 것이다 . 그래서 식구들이나 친지들로부터 비웃음을 사면서 살고 있음에도 변하지 않는 내 태도다 . 나와는 다르게 , 많은 사람들은 즐겨 수술의 길을 택하고 만족하는데 나로서는 지극히 못마땅하다 . 죽고 사는 것은 그 사람의 천부 ( 天賦 ) 적 생존능력에 달려있는 것이지 외부의 영향으로 인해 좌우되지 않을 것이라는 지극히 단순하고 명백한 이치에서 비롯된 고집이다 . 거기에는 그 사람의 삶이 얼마나 충실히 조물주의 창조적 뜻에 부합해 살았느냐 하는 데로도 견주어질 것이고 달라질 것이니 거기까지 싸잡아서 생각해보려면 한이 없을 것이어서 , 그대로 또 내 기준으로 말 할 수밖에 없다 . 과연 현대의술은 사람의 생명을 창조적 차원에서 재생복원유지 할 수 있는 것인가 . 나는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다 . 집도 ( 執刀 ) 의사들은 신으로부터 생명창조의 위임을 과연 받았는가 . 모를 일이다 . 분명한 한 가지가 있다면 수술 받는 사람이 온전히 의사를 믿으며 자기를 내맡기고 평안함으로써 자기의 회생 ( 回生 )
능력을 최적화한다는 의미에서 긍정할만하다 . 이런 좁은 범위로 울을 만들 수 있을 뿐이다 . 이점에 관해서 나도 내 말뜻에 내 발이 걸려 움츠리는 대목이 있는데 , 어떻게 변명의 여지가 없을지 궁리를 하다가 가당치 않은 괴변을 마련하였다 . 그것은 본질 면에서는 같은 맥락일 수 있다 . 빠져 없어진 어금니를 보조치아로써 달고 다니면서 이런 생각을 하기엔 조금은 빗나간 것 같은 생각도 들긴 한다 . 굳이 변명한다면 생명과 직결되지 않는 것 , 손톱 발톱과 같다고나 할까 . 그래서 가볍게 응했고 그만큼 덕도 보았다 . 헌데 이것을 장기의 교체로까지 확대해서 생각할라치면 입은 다물리고 만다 . 그럴 것이다 . 내가 이를 해 넣은 것이나 장기의 일부를 잘라버리거나 바꾸는 것의 차이를 굳이 달리 할 수 없는 것은 내 식견의 한계일 수 있다고 하면서 슬며시 논점에서 새어버린다면 그만일 것이다 . 아직은 죽지 않았으니 앞으로 나 또한 장기 절제나 이식의 한계상황에서 과연 거부할 수 있을 것인가? 장담하기 어렵다. 거창한 생명윤리 따위는 모르니 제쳐놓고 , 우주질서의 한 부분으로 완성되려는 속성을 지닌 인간생명을 생각할 때 그에 쫓아서 삶을 산다면 반드시 무병장수 할 것이라는 생각이다 . 병 , 고통 따위는 삶의 일부분일 테니 굳이 마다하지 않을 터이고 오히려 기꺼이 받아들임으로써 나를 완성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너무나 동떨어진 잠꼬댄지 , 생각게 한다 . 그런데 속물인 내가 생각하는 이 따위가 아무런 의미는 없는 것이니 이쯤해서 내 발등을 내려다볼밖에 없다 . 자식 된 도리를 하느라고 속에 담고 있는 마음을 내어 내 고집을 부릴 수는 없었기에 아무런 토도 달지 못하고 아내의 형제들끼리 이미 의논하여 진행되고 있는 수술의 절차를 잠자코 지켜볼 따름이니 그렇다 . 내 지나온 그 어렸을 적에 , 아버지의 병을 어찌하지 못하여 먼 산보며 외면하던 어느 날에 약에 쓰신다고 하시며 복사꽃을 따러 나서시는 어머니를 따라 ‘ 덕주꼴 ’ 로 가던 생각 , 허리 병 때문에 학교에 들어가지 못하고 방안에서 유희 ( 遊戱 ) 하던 여동생을 두고 발걸음 옮길 수 없었던 생각 , 이 모든 것들이 딴 세상을 사는 지금 내 심금 ( 心琴 ) 을 울리고 있다 . 의료시설에 기댈 엄두도 낼 수 없었던 시절의 일이긴 해도 아쉬움은 가시지 않는 그때의 일이다 . 어찌 할 수 없었던 유년시절의 일이긴 해도 새록새록 생각남은 아마도 지금의 나와 동떨어진 , 그때의 내 마음 한구석에 납덩이같이 무겁게 가라앉았던 쓰라린 아픔이 있었기 때문이리라 . 아버지나 여동생이나 지금처럼 화려한 시설에 접할 수 없었던 1930
년대의 일이었으니 비겨볼 마음은 없지만 그래도 그때의 그런 일이 지금에 일어났다면 과년 나는 어떻게 행동하고 있을까 ? 이율배반이긴 하지만 나 역시 무조건 병원으로 모셨을 것을 생각한다면 이제까지 뇐 것은 말짱 허울이라고 할 것인지 ! 나를 제외한 모든 이가 병원과 깊은 인연을 맺고 사는 오늘에 , 나 홀로 있어서 더구나 외롭다 . 더하여 내 뜻에 반하여 어쩔 수없이 병원에 의탁하는 처지가 앞날에 전혀 없을 것이라는 장담을 할 수 없는 것이기에 더욱 그렇다 . 내 의식으로든지 내무의식상태든지 현대의술로 인하여 내 본연의 생명을 연장하게 될지 , 아니면 단축하게 될지를 나 스스로가 장담할 수 없는 노릇이니 이런 저런 생각을 그저 혼자 뇌까린 것에 다름 아니다 ./ 외통-